불꽃처럼 승리를 향해쏴라

역사관

흥국생명여자배구단은 지난 1971년 태광산업 배구단으로 창단되어 국내 여자실업배구의 큰 줄기인 섬유단 배구의 1번지 구실을 수행해왔습니다.

70년대 최강의 전력으로 실업배구의 정상을 풍미하였고 80년대 중반 침체기를 걷다가 1991년 흥국생명 여자배구단으로 재창단되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여 한국여자배구 중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학원체육의 토양을 마련하기 위해 세화 여중고교 배구팀을 육성하고 있는 30년 전통의 명문 구단입니다.
2005년 여자프로배구가 출범하면서 흥국생명 여자배구단은 핑크스파이더스로 재탄생되었고,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유비무환의 자세로 끊임없이 준비하고 노력하는 팀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 2000년대
    2005년 11월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프로전환 선언,최초 V3달성의 쾌거도 이루었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여 10년간 흥국배구단과 함께 했던 이임감독의 정년퇴직으로 생긴 공백을 국가대표 이정철코치를 제 11대 감독으로 영입하여 노장 선수들의 은퇴에 따른 조직개편과 팀웍 정비로 팀 체질개선에 힘썼으며, 이정철감독의 사임에 따라 황현주코치를 제 12대 감독으로 발탁, 5개 구단중 가장 젊은 팀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흥국생명여자배구단은 2005년 11월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프로전환을 선언했습니다.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천안 유관순체육관을 연고구장으로 선정, 천안시에 배구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최근 몇년간 우수신인을 발굴함과 동시에 기존 선수들의 끊임없는 기량향상에 힘입어 강력한 서브와 백어택을 구사하는 가장 공격적인 배구, 가장 재미있는 배구를 구사하는 팀으로 팀 면모를 일신했습니다.프로배구 원년 흥국생명여자배구단 핑크스파이더스는 우승을 향한 팬들의 기대에 적극 부흥할 것입니다.

    흥국생명 여자배구단은 2005~2006 여자프로원년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동시에 제패, 통합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최근 몇 년간 우수 신인 선수 발굴과 기존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힘입어 얻어낸 값진 결과입니다.

    흥국생명 여자배구단은 2005~2006 시즌과 2006~2007 시즌에 이어 2008~2009시즌까지 3번의 V-리그 챔프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최초로 V3를 달성하는 쾌거에 이어 2010 수원.IBK기업은행컵 프로배구대회에서 우승을 달성하였습니다.

    이로써 정규리그 및 챔프전 그리고 한일탑매치, KOVO컵까지 모두 우승컵을 드는 영예를 안았습니다.앞으로 흥국생명 여자배구단은 계속해서 여자배구 최초의 V4를 달성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팀이 되겠습니다.

  • 1990년대
    1991년 부진의 80년대를 탈피하고자11월 2일 태광산업배구단은 흥국생명으로 새로운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1991년 부진의 80년대를 탈피하고자 11월 2일 태광산업배구단은흥국생명으로 새로운 유니폼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하듯 조배호 감독체제를 정리하고92년 새로이 현대감독출신 이임감독에게 지휘권을 넘기며 태광산업의 영화를 재현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임 감독은 새로운 팀개편 후 첫 출전한 92 제 1차 전국남녀실업배구연맹전에서 준우승을 거두며 배구 증흥의 서막을 알렸다 특히 국가대표 정은선, 고숙자, 신정화가 활약한 '93 대통령배에서는예상을 뒤업고 종합 3위에 입상하며 언론을 놀라게 했고 그 여세를 몰아 3년후 '96 전국실업배구대제전 1차대회 대천경기에서 15년만에 강적 LG정유를 3 - 2로 누르고 우승트로피를 거머쥐는 감격을 누렸다그 날 체육관을 찾은 흥국생명 대천지역 직원들은 경기종료후에도 1시간가량을 사물놀이로 체육관을 즐겁게 했고 정은선은 동대회 MVP로강미선은 세타상을 받으며 기량 발전의 터전을 마련했다 정은선은 이 대회를 계기로 국가대표 부동의 레프트 공격수로 자리잡으며 세타 강미선과 함께 일본킬러의 콤비로 국제 무대에서도 명성을 같이했다.

    97 - 98 시즌은 국가적 경제위기로 여자실업팀중 4개팀(후지필름,효성, 한일합섬,SK)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흥국생명은 전임직원의 지대한 관심과 성원으로 IMF의 한파를 넘기며 두해년동안 준우승 5회의 저력을 발휘하며 새로운 배구 증흥의 시대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1999년 9월 흥국생명배구단을 후원하기 위한 팬클럽이 회원 4500명으로 타구단의 부러움과 언론 관심속에 성대하게 발족되어 선수단에게든든한 후원자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 영향을 받아 10월 실업연맹전에서 비록 석패하였으나 강호 LG정유를 풀세트까지 접전을 펼치는 선전을 특히, 마지막 5세트를 14 : 12에서 역전당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선수단 전체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귀중한 경기였다.

    99시즌 부터 이임감독체제는 장신의 기교파 정지윤과 힘이 좋은 이영주를 주축으로 오랫동안 숙원해온 더블세타제 시행으로 막강한 공격력을 선보이며 여자배구판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1980년대
    80년대에는 74년 이래 170연승의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우며 천하무적의 팀으로 군림하던 미도파의 천적으로 태광산업의 전성기였다.

    70년대 중반 여자배구는 미도파의 독주시대였다. 출전만 하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었고 74년 이래 170연승의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우며 천하무적의 팀으로 군림하였다. 그런데 80년도 미도파의 독주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태광산업은 83년 7월 실업연맹전을 예선리그, 결승리그에서 미도파에게 2연패를 안기며 패권을 거머쥔 것이다. 예선리그에서 태광산업이 먼저 1. 2세트를 따낸 후, 3. 4세트를 내리 빼앗겨 승리를 놓치는 듯했으나, 마지막 5세트에서 심순옥,양순덕의 눈부신 활약으로 15 -10으로 승리 하며 창단 11년만에 미도파를 처음 꺾는 감격을 맛보았다, 그리고 결승 리그 또다시 미도파 경기 첫세트를 미도파가 15 - 5로 쉽게 승리하였고, 2세트부터 태광산업은 심순옥, 양순덕의 잇단 공격이 폭발하면서15 - 9로 이기며 승운을 잡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장충체육관 5천여명의 관중들은 일방적으로 태광산업을 응원하기 시작했으며, 그 힘은 코트장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트스코아 2 - 2 에서 마지막 5세트 태광산업은 1년생 세터 황둘선과 한태순, 김윤자등 신인들 공격이 백발백중 성공, 15 - 5 승리, 태광산업 선수들은 코트에 주저앉아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이어서 벤치로 달려가 송세영감독, 이동련코치를 행가리치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이같은 승리는 81년 4월 1차 실업연맹전에서 재현됐다. 태광산업은 악착같은 수비로 풀세트 접전 끝에 3 - 2로 승리 또 한차례의 우승을 차지했다.

    태광산업의 쾌거는 의외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훈련의 결과였다.

    1979년 새로 부임한 송세영 이동련 체제의 혹독한 스파르타 훈련속에 근성과 조직력을 다진 결과였다. 당시 주력선수로는 80년 입단한 황둘순, 한태순과 81년 최은숙, 정해주, 중앙여고출신 이재순, 황명순, 김선미등 이었다. 그후, 80년대 초반의 영광은 사라지고 80년 중반부터 무관의 세월을 보내는 침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령탑의 변화를 꾀하였으나 하위권을 탈출하는데 실패했다.

    80년대 초반 태광산업 전성기를 이끌던 송세영 감독이 83년 물러나고 대신 이동련코치를 감독으로 승진시켰으나 86년 또한번의 자리바꿈이 이루어 졌고 이번에는 무적 미도파시대를 이끌던 김형실코치를 감독으로 영입하는 등 진통을 겪었지만 성적 향상은 어려웠다.

  • 1970년대
    60년대 정상의 동일방직 배구단을 1971년 태광산업이 인수하면서 그해 8월 2일 태광산업 여자배구단 창단식이 거행됐다.

    60년대 정상의 동일방직 배구단을 1971년 태광산업이 인수하면서 그 해 8월 2일 태광산업 여자배구단 창단식을 거행됐다. 이 날 참석한 태광 임직원 및 체육계관계자의 갈채속에 선대 이임룡 회장은 박경윤단장에게 단기를 수여하며 당시 제 7구단 태광산업배구단 창단을 정식으로 알렸으며, 초대감독으로는 現배구협회 전무이사인 박승수 전무이사가 선임됐고, 선수들은 당시 국가대표인 덕성여고 출신의 주장 양진수, 인천여상 이영애, 중앙여고의 이순복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태광배구단이 등장한 1971년은 사실상 국가대표 단일팀이라 할 수 있는 국세청의 독주시대 였으며, 그 다음으로 산업은행과 석유공사가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여기에 동일방직 배구단의 간판을 내리고 새로이 전열을 정비한 태광산업배구단이 등장, 여자실업배구의 풍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태광산업은 창단 1개월만에 첫 출전한 9월 제 3회 MBC배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며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르었고, 이듬해 1972년 실업무대에 본격 나서며 3월 부산에서 열린 실업연맹전 5전 전승으로 창단 7개월만에우승을 일궈내는 괘거를 거두었다.특히, 5경기중 4경기를 3 - 2로 역전승하는 끈기와 투지를 보여줬고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석유공사를 3시간43분이라는 기록적인 경기를 벌인 끝에 우승을 차지 신생팀의 강인한 면모를 심어줬다.

    1972년 주목할 일은 선경합섬과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어 예측 불허의 명승부를 펼치며 팬들의 관심을 자아냈으며, 그해 對선경합섬 성적은 4전 4승의 완승이었다. 1973년 선수구성을 대폭 신인으로 정비하는 세대교체 진통으로 실업리그 1차전은 2승7패의 부진한 출발을 보였으나, 2차 리그에 와서는 6전 전승의 기록적인 전적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신인주축의 팀답게 전력의 기복이 심한 단점으로 74년을 무관의 세월을 보냈으나, 1975년부터 태광산업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975년 국가대표 이순복을 주축으로 전국대회 3관왕의 영예를 누리며 태광산업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태광산업의 간판 이순복은 75년 시즌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타점타와 빠른 공수전환,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발군의 기량을 보이며 히로인이 됐다. 1972년 뭔헨올림픽 주전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동메달 획득의 주역으로 한국배구사의 명플레이어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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